계약서는 상어, 진심은 고래⋯법원 판단은
계약서 오표시에도 당사자 의사합치 인정 시 계약은 유효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한 법률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중 계약은 당사자 사이에 권리와 의무를 발생시키는 가장 대표적인 법률행위이며 계약서는 그 내용을 증명하는 핵심 자료다. 가장 강력한 증거인 계약서는 일단 진정성립1)이 인정되면 문서에 적힌 내용대로 양자 간 합의가 존재한 것으로 보아 문서에 드러난 외형상의 의사가 우선 적용된다. 이러한 계약서의 중요성은 널리 알려져 있어 많은 사람은 계약서에 적힌 단어가 곧 법적 효력을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 거래에서는 당사자들이 실제로 합의한 내용과 계약서의 문언이 다르게 적히는 일이 적지 않다. 특히 계약상 중요한 부분이 착오로 인해 잘못 쓰였다면 이때 법원은 계약서의 문언을 우선시할까 혹은 당사자의 진정한 의사를 우선시할까.
이 문제를 잘 보여주는 판결이 대법원 93다2629 판결이다. 이 사건의 사실관계는 다음과 같다. 이 사건 토지의 소유권이 1969년 소외 1에게 넘어갔다가 이후 여러 차례 이전돼 1982년 원고 명의로 등기됐고 피고는 이 사건 토지 상에 건물을 소유하며 점유하고 있었다. 이때 피고는 소외 1이 실제 점유하던 인접 국유지가 아닌 이 사건 토지에 관해 착오로 매수 신청해 불하받았으므로 국가의 불하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에 원고는 피고의 주장을 배척하고 건물 철거 및 토지 인도를 청구했다. 이 사건의 쟁점은 부동산 매매계약에 있어 당사자들이 특정 토지를 계약 목적물로 삼았으나 그 목적물의 지번 등에 관해 착오로 계약서에 다른 토지가 기재된 경우 계약은 문언대로 해석해야 하는지 아니면 당사자의 진의에 따라 해석해야 하는지이다. 계약서의 법적 효력은 강력한 것이기에 계약 당사자가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면 계약 문언대로 해석돼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대법원은 “쌍방당사자가 모두 특정의 갑 토지를 계약의 목적물로 삼았으나 그 목적물의 지번 등에 관해 착오를 일으켜 계약을 체결함에 있어서는 계약서상 그 목적물을 갑 토지와는 별개인 을 토지로 표시했다 해도 갑 토지에 관하여 이를 매매의 목적물로 한다는 쌍방당사자의 의사 합치가 있는 이상, 위 매매계약은 갑 토지에 관해 성립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판시했다. 이어 “만일 을 토지에 관하여 위 매매계약을 원인으로 해 매수인 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가 이미 경료됐더라도, 이는 원인이 없이 경료된 것으로서 무효”라고 부연했다. 즉 계약 해석 시 형식적인 문구에 얽매이지 않고 당사자의 진정한 의사를 탐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러한 법리를 ‘오표시 무해의 원칙’이라고 한다. ‘오표시 무해’는 ‘잘못된 표시는 해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당사자들 사이의 내심의 의사는 합치됐으나 표시·문구 등 외관을 잘못 설정한 경우 양 당사자가 실제로 일치시킨 의미대로 효력이 발생하며 표시상의 오류는 ‘무해’로 본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우리 민법에 명문으로 규정돼 있지는 않으나 로마법에서 유래돼 대법원 판례가 인정하고 있다. 핵심은 형식보다 실질·문구보다 진의가 우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표시 무해의 원칙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이른바 ‘고래고기 사건’이다. 이 사례에서는 A와 B가 고래고기를 매수하는 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서에 ‘Haakjoringskod(Haakjöringsköd)’라고 기재했다. 그런데 A가 막상 받은 물건은 고래고기가 아니라 상어고기였다. 알고 보니 해당 단어가 노르웨이어로는 상어고기를 의미했으나 독일어로는 고래고기를 의미했고 무엇보다 고래고기의 가격이 상어고기보다 매우 비쌌다. 독일 법원은 ▲A가 고래고기 전문 요리점에 요리 재료를 공급하는 상인이라는 점 ▲상어고기 보다 고래고기의 가격이 월등하게 고가로 거래되는 점을 감안해 A와 B가 계약 목적물로 삼은 것은 고래고기로 이해함이 합당하다고 판결했다. 설령 'Haakjoringskod(Haakjöringsköd)'가 잘못된 표시였더라도 당사자가 의도한 것이 '고래고기'라고 판단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표시 무해의 원칙으로 계약서의 중요부분이 잘못 표시되더라도 원래대로 복구시킬 수 있다는 점은 우리의 정의 관념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실무에서는 ‘오표시 무해의 원칙’과 ‘착오에 의한 취소’를 구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민법 제109조는 “의사표시는 법률행위의 내용이 중요부분에 착오가 있는 때에는 취소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착오가 표의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때에는 취소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착오에 의한 의사표시의 경우 ▲계약 당사자 중 일방 당사자만 착오한다는 점 ▲착오한 내용이 계약의 중요부분인 점 ▲착오한 것에 중대한 과실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 모두 성립돼야 계약의 취소가 가능하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상대방이 그 착오를 알면서도 이를 이용한 경우라면 중대한 과실로 인한 착오가 발생했더라도 착오에 의한 계약 취소가 가능하다. 반면 오표시 무해의 원칙은 양 당사자 모두 착오로 표시를 잘못한 경우로 표시의 오류만이 문제될 뿐 계약은 유효하게 성립한다. 따라서 두 법리의 중요한 차이점은 계약의 취소 여부와 당사자의 의사합치에 있다.
결국 법원이 오표시 무해의 원칙을 인정하는 이유는 계약의 본질이 단순히 글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 사이의 실제 합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계약서를 소홀히 작성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오표시 무해의 원칙은 예외적으로 진의를 구제해 주는 장치일 뿐 그 적용을 입증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따라서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목적물·금액·당사자·이행 시기·해제 조건 등 핵심 사항을 명확히 기재하고 수정된 내용은 반드시 재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필요하다면 이메일이나 문자로 협의 내용을 남겨 두거나 계약 당시 녹음을 하는 것도 좋다. 특히 부동산이나 고액 거래처럼 분쟁 가능성이 큰 계약일수록 문언 하나가 분쟁의 방향을 바꿀 수 있어 실제 의사를 나타내는 증거가 많을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생활 속에서 계약은 너무 흔해서 오히려 방심하기 쉽다. 하지만 계약서에 적힌 말 한마디는 생각보다 무겁다. 그럼에도 법은 때로는 글자보다 진정한 약속을 본다. 오표시 무해의 원칙은 바로 그 점을 보여주는 법리다.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문구를 믿기보다 그 문구가 실제로 서로의 뜻을 정확히 담고 있는지 다시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분쟁을 막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고 계약의 신뢰를 지키는 첫걸음이다.
생활과법률란 조은서
1. 문서나 사실이 작성 명의자의 의사에 따라 작성됐고 그 진정성이 인정된 상태
